사랑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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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혼자 학교 도서관을 전전하던 시기가 있었다. 어떤 책을 읽을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판타지 소설만 잠깐 읽고 나오던 시기였다. 이 책은 그때 당시 처음 알게 된 책이었다. '사랑'과 '기술'이라는 다소 어색한 단어의 조합이 궁금증을 자아냈고, 필독 도서로 지정될 정도로 유명한 책이라는 데에서 큰 인상을 받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에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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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느끼는 고통이 분리에 의한 불안으로부터 온다고 한다. 내 나름대로 해석하면 이 고통은 고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 인간은 세계 또한 인지하기 시작한다. 스스로와 세계를 인지하기 시작한 인간은 점차적으로 세계와 분리된다. 이 분리는 고독 혹은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낳았다. 프롬은 인간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가 이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역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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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의 답은 명확하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만이 이 고통을 완전히 해소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성 간의 사랑과 조금(혹은 많이) 구별된다. 프롬은 보다 넓고 보다 깊은 사랑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은 사랑이 필요한 이유를 시작으로 사랑에 대한 이론을 심도 있게 다룬다. 길고 장황한 이론이 끝난 후에야, 기술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게 눈 감추듯 실천의 내용을 다루고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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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이 '기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처럼, 분리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훈련하고 집중하고 인내하여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 이 중에서도 집중이 핵심인 것 같다. 프롬은 사랑을 이룩하기 위해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집중하는 연습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전념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 프롬은 집중을 통해 자립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만일 자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를 의지한다면 그건 구조는 될 수 있지만 사랑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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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기술을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집중을 통해 자립하고, 집중을 통해 상대를 온전히 인식한다. 그래야만 도취와 애착으로부터 벗어나 분리의 불안이라는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 프롬이 말하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있지만 내가 이해한 핵심은 이런 것이다. 특히 이는 책이 쓰인 지 50년이 지난 요즘에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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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해상도를 점점 높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인지하고 다루는 시간의 단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계절과 절기만 있으면 충분했던 농업시대와 달리, 산업시대의 기계와 공장은 우리를 시간 단위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현대에 이르러서 우리는 분 단위를 넘어 초 단위로 움직이고 있다. 이는 좋아하는 가수, 공연, 식당을 예약하기 위해 서버 시계를 켜놓고 준비하는 모습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이렇게 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기술은 벌써 우리에게 초 단위 이상의 해상도를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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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현대의 우리는 대 콘텐츠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콘텐츠들이 공개되고 있다. 이는 음악, 영화, 드라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기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보의 바다는 이미 우주가 되고 있다. 정보의 우주 속에서 우리는 종종 미아가 되어버린다. 넷플릭스에 들어가 뭘 볼지 고르다가 결국 고르지 못하고 꺼버리는 경험을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하물며 요즘은 OTT 서비스 자체도 늘어나고 있다. 답도 없이 늘어나는 선택지 속에서 우리는 방황하기 일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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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단위 시간 개념과 넘쳐나는 콘텐츠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극한의 멀티태스킹을 시작하게 되었다. 유튜브를 켜놓고 밥을 먹으며 책을 읽는다. 눈으로는 글을 보고, 귀로는 음성을 듣고, 입으로는 음식을 즐긴다. 후각과 촉각이 메인 콘텐츠인 무언가가 나오면 우리의 오감으로 다섯 가지 콘텐츠를 즐기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모든 감각을 처리하는 뇌는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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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뇌는 멀티태스킹을 하는 게 아니라 빠르게 스위칭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위칭은 우리의 집중력을 급격히 떨어뜨린다고 한다. 한 시간짜리 드라마를 보던 시절에서 10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보고 최근에는 1분 이하의 쇼츠나 틱톡이 유행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심지어 그마저도 스킵하면서 보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1분짜리 영상도 집중해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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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을 못 하게 된 우리는 더 많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장경제는 방황하는 우리의 선택을 붙잡기 위해 자극적으로 바뀌어 간다. 수많은 자극에 지친 우리는 달래줄 무언가를 찾는다. 어느 순간부터 등장한 '힐링'이라는 단어가 그 예이다. 이렇듯 지난 수년간 우리는 때때로 상처 받고 때때로 치유하면서 나아가고 있다. 나는 이 과정이 우리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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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의 급증, 취미의 다양화, 자기 계발에 대한 관심 증가, 그리고 우리를 위로하려고 하는 수많은 서적과 영상들의 범람을 보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자립으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과정이기에 프롬이 말하는 사랑을 달성한 사람들은 소수이지만 말이다. 결혼과 출산이 늦어지고 줄어들고 있지만 이혼율도 함께 감소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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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건지 인간 실존에 대해 생각하는 요즘 프롬의 이야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많은 공감이 가기도 했다. 그리고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책을 읽고 경청을 연습하는 나로서는 프롬의 이야기가 반갑기도 했다. 실천의 길은 아직 요원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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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할 것이고 이 사람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는 위대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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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본 책에 대한 나름대로의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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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태도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사랑할 또는 사랑받을 올바른 대상을 발견하기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
- 사람들은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하며,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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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최초의 조치는 삶이 기술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론의 습득과 실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선 이론에 대한 내용을 다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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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생명'이다. 자신의 생명이 덧없이 짧으며, 원하지 않는데도 태어났고 원하지 않아도 죽게 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보다 먼저 또는 늦게 죽게 되리라는 사실의 인식, 자신의 고독과 분리에 대한 인식, 자연 및 사회의 힘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인식한다. 이러한 모든 인식은 인간의 실존을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나가 어떤 형태로든 외부 세계와 결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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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내가 인간적 힘을 사용할 능력을 상실한 채 단절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무력하다는 것, 세계를 적극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 나의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 되고 수치심과 죄책감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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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 모든 문화의 인간은 분리 상태를 극복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이다. 대표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 인류의 유아기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꼈다. 이는 토양, 동물, 식물 등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가면을 쓴다거나 토템으로 삼아 숭배하는 일로 표현된다. 그러나 원초적 결합에서 벗어날수록, 인류는 자연의 세계에서 더욱 분리된다.
- 온갖 종류의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성적 도취 등으로 나타난다. 알코올이나 마약으로 인한 도취는 그 상태가 끝나고 나면 더욱 심한 분리감을 느끼게 된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 또한 한순간을 제외하고는, 두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혀주지 못한다.
- 개인의 자아를 포기하고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합일도 한 가지 방법이다.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고독으로부터 구제되는 것이다. 독재체제는 이러한 일치로 이끌기 위해 공포를 이용하며, 민주국가는 암시와 선전을 이용한다. 군중과의 일치는 발작적이지 않고 지속적이지만 불충분하다.
- 합일을 이루는 또 다른 방법은 '창조적 활동'이다. 이는 '내'가 계획하고 만들어내고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산적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합일은 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도취적 융합에서 이루어지는 합일 역시 일시적이다. 그러므로 부분적 해답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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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해답은 대 인간적 결합,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 곧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 인간적 융합에 대한 욕망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며, 이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자기 파괴 또는 타인 파괴가 일어난다. 그러나 대 인간적 융합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심각한 난관에 부딪힌다. 융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각 방식의 차이는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가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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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종류의 합일에 대해 말하는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해답으로서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또는 '공서적(共棲的) 합일'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프롬은 전자의 의미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만 후자에 대한 '사랑'을 먼저 검토한다.
- 공서적 합일은 어머니와 태아의 관계에서 그 유형을 볼 수 있다. 어머니와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다. 그들은 함께 살고 서로의 일부이다. '정신적'인 공서적 합일에서는 두 신체는 독립적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애착이 존재한다.
-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는 복종 혹은 피학대 음란증이다. 이러한 인간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고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결코 외롭지 않지만 독립하지 못한다. 그들은 통합성을 갖지 못하며 완전히 탄생하지 못한 자다.
-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지배 혹은 가학성 음란증이다. 이러한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서 고독으로부터 도피한다. 그들은 자신을 숭배하는 다른 사람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팽창시키고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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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서적 합일과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이는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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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는 행위 자체에서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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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능동적 성격은, 준다고 하는 요소 외에도 보호, 책임, 존경, 지식 등을 내포한다.
- 사랑에 보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모성애에서 가장 명백히 나타난다.
- 보호에는 책임이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상대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 보호와 책임이 지식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면 맹목일 것이다. 사랑의 한 측면인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상대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화를 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이 나타내지 않았을 때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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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 책임, 존경, 지식은 서로 의존하고 있다. 이들은 성숙한 인간, 곧 자신의 힘을 생산적으로 발휘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차지하려고 하고, 전지전능이라는 자아도취적 꿈을 포기하고, 오직 순수한 생산적 활동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터득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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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한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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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하는 성격의 방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받는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모든 형태의 바탕에 놓여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은 형제애, 모성애, 성애, 자기애, 신에 대한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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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이와 같이 경험되는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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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활동하는 과정에 조화, 갈등, 기쁨, 슬픔 중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고,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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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욱 힘든 문제, '사랑의 기술의 실용'을 다룬다. 어떤 기술의 실천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술의 실용에는 '훈련'이 요구된다. 훈련이 없으면 기술에 숙달되지 못할 것이다. 다음은 '정신 집중'이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홀로 있기 어렵다는 점에 명백히 나타난다. 세 번째 요소는 '인내'이다. 빠른 결과만을 바란다면 우리는 결코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 끝으로,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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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정신 집중을 배운다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명상을 하거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음악 감상, 독서, 대화 등에 전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 집중은 서로 사랑하고 있는 모든 사랑이 실행해야 한다.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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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종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자아도취의 반대는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이고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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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는 중요한 내용이 남았지만 귀찮음으로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