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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수년 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1, 2(이하 '지대넓얕')>를 보고 나서이다. 지대넓얕은 한창 상식의 부족함을 느끼고 서점을 서성이던 와중에 발견했다. 제목부터가 내가 원하는 바를 아주 잘 반영하고 있었다. 지대넓얕은 현실(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를 다루는 1권과 현실 너머(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를 다루는 2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공대생이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2권에 더 시선이 갔다. 그런데 더 재밌게 봤던 건 1권 현실 편이었다. 특히 역사, 경제, 정치와는 중학교 이후로 철옹성 같은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책을 읽고 너무나도 손쉽게 벽을 허물 수 있었다. 아마 중학교 때 이 책을 접했으면 내 인생이 크게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의 충격을 당시에 느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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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지대넓얕 0편은 흥미가 있는 주제가 아니었음에도 상당한 기대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던 1, 2편과 달리, 0편은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생각만 해도 지루하고 길것 같은 이 여행은 아니나 다를까 우주의 탄생부터시작했다. 우주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해석들을 소개하면서, 지구에서 인류, 문명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은 역시나 너무 지루했다. 아마 설명이 조금만 어려웠어도 포기했을 것 같다. 그렇게 지루한 부분을 넘어가니 점차 흥미로운 내용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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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짧고도 긴 역사 속에서 등장한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들이 등장했다. 위대한 스승들은 세계가 무엇인지, 자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세계에 던져진 자아의 의미를 밝혀냄으로써 어떻게 세계를 이해하고 대면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책은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에 대해, 세계와 자아를 구분하지 않는 일원론과 세계와 자아를 구분하는 이원론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거대 사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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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베다>이다. 이는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기타>, <힌두교>로 전통이 이어지고 인도 사상의 뿌리가 된다. <베다>의 핵심은 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범아일여 사상이다. 두 번째는 <도가>이다. 이는 노자를 시작으로 공자, 신유학으로 이어진다. <도가>는 우주적 질서인 도와 개인의 내면인 덕을 일치시키는 도덕일치를 말하며 중국 사상의 핵심이 된다. 세 번째는 <불교>이다. 이는 붓다 초기의 가르침과 이후 등장한 대승불교의 중관파와 유식파로 이어진다. <불교>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세계나 자아를 인정하지 않고 자아의 내면 안에서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려는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을 전한다. 이렇게 세 가지는 동양 사상사의 큰 기둥이 되었고 신기하게도 모두 일원론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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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서양 사상사는 동양과 반대로 흘러간다. 네 번째는 <철학>이다. 서양의 철학은 이원론과 로고스 중심으로 정의할 수 있는 플라톤주의에서 시작한다. 이는 자아와 세계를 분할함으로써 주체가 대상을 교정하고 교화하는 것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사상은 많은 발전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비극을 낳기도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칸트가 초월적 관념론을 제시함으로써 자아와 세계의 분리라는 이원론의 전통을 극복한다. 다섯 번째는 <기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사도가 된 바울은 추상화와 일반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격상시켰다. 교회는 바울의 사상을 토대로 성장했지만 신과 인간은 분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속에서도 일원론적 측면에 대한 탐구가 있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의 내면의 신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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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이는 각자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이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세계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나름대로의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수많은 세계관을 가장 크게 나눈 것이 이원론과 일원론이다. 이 책에 의하면 인류는 이 두 가지 거대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일원론이 주류가 되고 있다는 듯하다. 동양에서 태어났지만 서양 사상에 익숙한 우리에게 일원론은 많이 어색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더욱더 일원론에 대한 사유를 주장한다. 세계의 절반을 점유하고 있는 세계관에 대해 사유하고 경험함으로써 내면세계의 영토를 넓히자고 한다. 그리하여 물질세계에 마음을 빼앗기고 인생을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는 등,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갖가지 느낌과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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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일원론적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세계관에 대해서 어떻게 언어로 표현해야 할지 묘연한 감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다섯 가지 가르침에 대한 설명은 참 반가운 내용들이었다. 이 가르침들을 읽으면 머릿속 안개가 걷힐 것만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많은 도움은 되었지만 명쾌하지는 않았다. 내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요약된 내용들을 전해 듣는 입장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다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사유의 방향이 명확해졌다는 점에서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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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우주를 지켜보고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는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
- 책,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중에서